먼저 된 자로 살자 (막 10:28-31) (2024)

  • 이전글
  • 다음글
  • 목록

본문

먼저 된 자로 살자 (막 10:28-31)

편견의 위험성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무능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러나 무지는 더 무섭다. 나아가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이다.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무능한 것은 불행합니다. 무능한 사람과 일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무능한 것은 인간에게 아주 불행한 일이고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지는 더 무섭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잘못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한 여성이 “모든 남자는 다 늑대와 같다”라고 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한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그 자신의 편견이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여성은 여우와 같다.” 한 여성에게 상처받은 남자가 모든 여성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자기 편견을 남에게 보편화하는 강요입니다. 친구를 보고 “너 결혼하지 마라.” “남자들은 늑대야.” “여자들은 여우야.” 자기가 경험한 그 불행을 가지고 그것이 기준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 보편화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편견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극심하다고 진단합니다. 개인 뿐 아니라 인간이 모인 공동체 안에 있는 인간관계의 가장 두꺼운 장애물은 편견입니다. 부부 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친구 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이 편견의 병이 점점 중병으로 치닫고 있다고 탄식을 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아주 무서운 편견의 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이 말을 한 것은 그는 당당한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당당한 제자이지요. 주여, 우리를 보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베드로는 정당한 예수님 앞에 합격자로 자처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우등생으로 자처합니다. “주여, 나는 우등제자이지요. 보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볼 때 미달인데 그는 우등생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 큰 소리를 칩니다.

우등생 의식

베드로의 이 편견은 오늘 우리 안에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이 우등생 의식, 주님 앞에는 미달하고 있는데도 나는 우등생인 것처럼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향하여 염려스러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한 줄 알고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이 요구하는 제자도의 기준은 너무 높습니다. “아비나 어미나 아들이나 딸이나 집이나 전토를 버리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높은 카트라인에 미달하는데도 베드로는 당당한 줄 알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주님 앞에 실수하고 넘어졌습니다. 주께서 “내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은 후에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로막고 “주여, 그런 일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 여지없이 넘어지는 이 베드로가 큰 소리를 치면서 “보시옵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로마 군병들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의 그 모습, 3년이나 훈련받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철부지 제자인데도 본인은 처음부터 나는 당당한 제자의 모습으로, 우등생 제자의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고사에 고대 중국인들은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간장은 왼쪽에 있는 것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과학자요 신부였던 이탈리아의 쟈크롱호가 ‘인체해부학’이라는 책을 중국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심장은 왼쪽에, 간장은 오른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해부를 해서 과학적으로 공인된 의학이론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중국인들은 ‘아, 서양인과 동양인은 얼굴이 다르듯이 속 내부도 다르구나! 우리는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간장이 왼쪽에 있는데 그들은 심장이 왼쪽에 있고 간장이 오른쪽에 있구나!’ 참 심각한 무지요 편견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철부지 베드로가 큰 소리 치는 모습을 보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들이 많으니라.” 여기 먼저 된 자는 은혜입니다. 먼저 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먼저 된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먼저 믿은 것은 은혜이며 복입니다. 그런데 먼저 된 자가 먼저 된 자리를 지켜야 복입니다. 유지해야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떨어지는 그것이 불행입니다. 그런데 먼저 된 자가 떨어질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나중 되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먼저 될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된 것은 은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앞두고 이런 가르침을 주신 것은 매우 의도적인 교훈입니다. 여기 먼저 된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먼저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특권층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자체가 놀라운 기득권입니다. 그 자손들은 일생이 보장되는 기득권을 가진 유대사람입니다. 그 기득권을 가진 먼저 된 이들은 율법의 선생입니다. 전문직 종교인들입니다. 평생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과 항상 함께 대치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기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우로 치우친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유대인이요 율법을 공부한 사람들이요 무엇으로 보나 모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로 치우쳤습니다. 이 특권층에게 버림받은 계층, 세리와 창기와 가난한 자들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해서 예수님 주변에 언제나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경을 가르치실 때 이 두 부류를 항상 염두에 두고 가르칩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떨어질 것을 말합니다. 나를 거부하면 이들이 멸망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언제나 두 부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을 싫어합니다. 좌냐 우냐가 아닙니다. 좌도 치우쳤고 우도 치우쳤습니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준에 돌아온 세리와 창기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주님께 와서 “선생님,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율법을 아느냐?” “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그러나 제가 다 지켰습니다.” 그 때 주님이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영생이 있으리라.” 이 율법사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가 모든 인생에게 다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재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념, 자신의 예술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 욕심 때문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주님께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사가 그 한 가지, 본인에게 있었던 그 재물관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돌아갔습니다.

믿음의 현재성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다”는 이 말씀에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이 본문은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지난날의 먼저 된 것을 자랑하고, 지난날의 나중 되었던 것을 비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먼저 된 자로서 나중으로 떨어지는 지금이 문제이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지금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믿음의 현재성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잠시 틈을 내서 기도하러 가시든지 제자들과 함께 없는 그 시간에 제자들끼리 무슨 놀이를 했습니까? “누가 크냐”는 것으로 시비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8명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비 어부출신 중에 가룟 유다는 그 당시에 독립운동 단체의 멤버입니다. 상당히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심당 시몬도 상당히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열심당은 율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도 세리입니다. 그가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그래도 공직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부들과 비 어부들, 이 사람들이 누가 크냐 라고 다툴 여지가 있고 어부들끼리도 누가 크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중에 누가 크냐?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탄식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서로 의논하느냐? 왜 다투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누가 크냐는 내 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한 수 더 떠서 예수님께 와서 “주여, 하나님 나라에서 우편에는 내 한 아들을, 좌편에는 둘째 아들을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부모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예배드리는 교회에 와서 누가 크냐는 것이 성령의 관심일까요? 네가 앞자리에 앉았는가? 뒷자리에 앉았는가? 그것이 성령의 관심입니까?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 편견을 보니 그것이 관심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것이 관심이 아닌데 우리는 관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의 편견입니다. 이것은 깨뜨려야 할 편견입니다. 경기장에서 게임하는 선수들이 선배냐 후배냐 그것이 문제입니까? 축구경기 하는 선수들은 골을 넣어서 팀을 이기게 하는 그 선수가 영웅입니다. 그 선수가 대우를 받습니다. 야구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홈런을 쳐서 팀을 이기게 하는 그 선수가 영웅입니다. 그 게임하면서 “야, 선배가 골을 넣기 전에 너는 넣지 마.” “선배가 홈런을 치기 전에 너 홈런 치지 마.” 이런 팀은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 와서 누가 크냐가 무슨 주님의 관심입니까? 골을 넣는 하늘나라의 주전 선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홈런을 치는 선수가 되십시오. 홈런을 친 사람을 시기하지 말고 내가 홈런을 쳐서 팀을 이기게 하는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원리는 꼭 같습니다. 선후배, 앞자리, 뒷자리, 누가 크냐? 철부지 제자들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은 너무나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먼저 믿은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먼저 받은 은혜입니다.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받은 기회를 잘 살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받은 충성에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실력을 높이자

제가 연말연시에 토론 프로그램을 여러 개를 보았습니다. 각 계, 각 분야의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했습니다. 제가 토론을 지켜보다가 그 자리에 앉아도 한마디 하고 싶다는 말이 가끔씩 떠올랐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모든 분야 이야기를 다 집합을 하면 한마디로 “우리 실력이 이것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국민소득 만 불이 10년째 됩니다. 국민소득이 만 불 올랐다가 10년 동안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실력입니다. 우리가 그 실력이 없는데 실력이 없는 사람을 보고 점수를 더 받아오라는 것 보다 딱한 일이 없습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을 보고 일하는 것도 딱한 일입니다. 실력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력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딱한 사람입니다. 일 못하는 사람은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내 실력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만 불은 후진국에서 보면 대단한 것입니다. 국민소득 천불 안팎으로 헤매는 나라가 대부분입니다. 국민소득 만 불은 보통 잘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내막을 보면 절대 빈곤이 10%입니다. 북한에서 남한을 역선전 할 때 남한은 거지들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대 빈곤층 10%를 TV에 방영을 하면 대한민국은 거지나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도시의 빈민층을 방송에 띄웠습니다.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아직도 저런 동네가 있는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절대빈곤층이 10%입니다. 농민들이 지금 굉장히 힘듭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고 가망이 안 보입니다. 농사를 지어 봐도 그렇고, 시키는 것을 해 봐도 그렇고, 무분별하게 농촌에 음식점만 들어서서 손님들도 없이 파리만 날리고 있고, 위락시설을 무분별하게 해서 장사되는 데도 있고 안 되는 데도 있고, 농민들이 걱정을 많이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사하시는 우리 성도들은 아주 힘들어 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장사가 되지 않습니다. 만 불 시대인데, 수출은 많이 되지만 고루고루 우리에게 혜택이 오지 않습니다. 불균형입니다. 우리 실력이 이것 밖에 안 됩니다. 극복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실력은 석, 박사가 아니라 영적인 실력을 말합니다. 영적인 실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존심을 낮추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편견을 가진 그 자존심을 내세웁니까?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분량이 없는 사람은 편견을 내세웁니다. 섬기는 사람은 절대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편견, 빗나간 자존심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더러운 자기 편견을 내세웁니다.

오늘 우리는 실력을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실력의 영적개념은 본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주려 하심이라” 영적 실력의 최고봉은 섬김입니다. 섬기는 분량입니다. 섬기는 분량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분량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뒤로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로 짓밟고, 내가 높아지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영적 실력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는 여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것이 실력입니다. 이 실력을 높이지 않고 자기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우리를 낮추는 여기에 사는 길이 있고, 은혜 받는 길이 있고, 복 받는 길이 있고, 먼저된 것을 지키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대가 치러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저는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격언입니다. 여러분, 학생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라는 신념을 가지고 공부해야 실력이 늘어납니다. 학생이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하면 그 학생은 절대로 공부 못합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는 이 철학을 붙잡고 있을 때 공부 못합니다. 행복은 성적순입니다. 이것을 확고하게 붙잡고 공부하는 학생이 진짜 공부를 합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 잠시 있었습니다. 제가 연수했던 그 학교에 한국 유학생들이 10여명 정도 공부를 했습니다. 성공하는 유학생도 많지만 실패하는 유학생도 많습니다. 어학연수를 가서 제대로 하는 학생도 있지만 안 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공부합니까? 실력은 2차문제입니다. ‘유학 와서 내가 이 공부를 돌파하지 않으면 내 미래가 없다.’ ‘내가 이 공부를 통해서 성공하겠다.’ ‘부모의 피땀 나는 돈을 받으면서 이 공부를 돌파해야 내 인생은 성공이다’는 신념을 가진 학생은 성공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철학을 가진 학생은 공부 못합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TV에 나와서 굳이 형편이 안 되고 실력이 되지 않으면 대학을 갈 필요 없다고 대학 무용론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대학을 가지 않은 어떤 사람은 성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대학을 가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대학을 가지 않고 성공한 미용사 박 준, 영화배우 장미희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대학에 가서 강의합니다. 그런 사람이 몇 명 됩니까? 대학을 가지 않고 모두 박 준이 됩니까? 왜 그런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 합니까? 여러분, 적어도 공부하는 학생은 내 인생의 승패는 이 공부에 달렸다는 신념입니다. 0.1%는 성적순이 아니라도 행복한 사람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눈 뜨고 바로 보십시오. 성적순대로 성공합니다. 성적순대로 출세합니다. 실력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에디슨 같은 사람이야 퇴학을 당하고도 세계위인이 되었지만 모두 에디슨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편견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아주 멋있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기업철학 중의 하나가 ‘천재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천재 한 사람을 키워서 기술개발을 해야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만 명 먹을 것을 한 사람이 꿀꺽 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것만 먹으면 되는데 왜 만 명의 것을 혼자 먹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 오천 명을 먹이는 우리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런 사람의 철학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남의 것을 탈취하거나 희생시키는 자가 아니라 남에게 나누어 주고, 남을 먹일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먼저 된 자의 사명이요 먼저 된 자의 사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중에 나중 된 자이지만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높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도의 자리를 마지막까지 지키고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흔적을 남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먼저 된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의 삶의 철학은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자기 자랑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일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 이것을 그는 항상 앞세웠습니다.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먼저 된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우리 앞에 말해줍니다.

맺는 말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우리는 다른 자랑이 너무 많이 튀어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계셔야 합니다. 그를 등 뒤로 돌려놓고 우리가 아무리 나서도 해답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고 그분을 내세우고 그를 높였더니 바울은 영원히 먼저 된 자의 길을 살았다고 우리 앞에 간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먼저 된 자들입니다. 이 축복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먼저 된 자의 사명 앞에 엄숙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져 버리면 먼저 된 자의 축복을 잃어버리는 경고가 주님의 말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용호 목사)

  • 이전글
  • 다음글
  • 목록
먼저 된 자로 살자 (막 10:28-31) (2024)
Top Articles
Latest Posts
Article information

Author: Pres. Lawanda Wiegand

Last Updated:

Views: 5746

Rating: 4 / 5 (51 voted)

Reviews: 90% of readers found this page helpful

Author information

Name: Pres. Lawanda Wiegand

Birthday: 1993-01-10

Address: Suite 391 6963 Ullrich Shore, Bellefort, WI 01350-7893

Phone: +6806610432415

Job: Dynamic Manufacturing Assistant

Hobby: amateur radio, Taekwondo, Wood carving, Parkour, Skateboarding, Running, Rafting

Introduction: My name is Pres. Lawanda Wiegand, I am a inquisitive, helpful, glamorous, cheerful, open, clever, innocent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