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된 자의 나중 됨 (마 20:1~16) (2024)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우리는 무엇이 다 되었다거나, 무엇을 이루었다고 여길 때에,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기의 자리에 서 있게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패와 어려움의 자리에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이 오히려 값진 축복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천국의 역사는 원하는 것을 가졌다거나 성공하거나 무엇을 이루었을 때 보다는, 오히려 실패나 어려움의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 본문의 말씀은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사회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루의 일은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나가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일군들을 고용했습니다. 다시 아침 9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면서 그들을 일군으로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12시와 오후 3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일군들을 불러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오후 5시에 또다시 나가보니 그때까지도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도 역시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했습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자 주인은 일군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모든 일군들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의 품삯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이러한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도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 군요”(표준새번역)
그러나 먼저 온 일군들의 불만에 대해서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요.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에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단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표준새번역)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끝내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의 모습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먼저 된 자의 수고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된 자입니다. 먼저 된 자의 기쁨과 영광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먼저 되어 수고와 헌신의 값진 일을 이룬 자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이 먼저 된 자의 값진 가치와 영광을 잃어버리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성서본문의 먼저 된 자는 자랑스러움과 영광을 잃어버리고 나중 된 자가 되는 부끄러움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였던 먼저 온 일군들의 모습에서, 먼저 된 자이면서 나중 된 자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먼저 온 일군들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주인에게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이유는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자신을 어떻게 똑같이 대우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디며 땀 흘려 일했는데, 어떻게 한 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품삯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온 일군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하여 주인은 자신의 정당성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온 일군들과 약속된 대로 한 데나리온 품삯을 주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 온 사람에게 먼저 온 자들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준 것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품삯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먼저 온 일군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인의 의도를 함부로 넘어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자신의 생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주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평했습니다.
일거리가 없는데 불러주어서 일하도록 해준 포도원 주인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인의 배려와 은총에 대해서 찬양하기보다는 품삯에 대하여 비교하면서 주인을 부당한 사람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일군에게 먼저 온 자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내 생각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기보다는 우리 임의로 비교하면서 함부로 쉽게 판단하거나 단정하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8:8-9)

우리는 한 데나리온 품삯을 받을 수 없는 일군에게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와 사랑인 천국의 역사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당하다고 함부로 평가합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먼저 된 자로 나중 된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지배하면 먼저 된 자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나중 된 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이웃을 향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을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일군을 향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자신이 더 많이 했기 때문에 더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해서 자신은 더 특별히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거리 없는 실업자를 불러서 일하게 해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주인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특별해야 한다는 것은 먼저 된 영광을 잃어버리는 나중 된 자의 모습입니다.

어린 시절에 교회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들어 기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제일 훌륭하고 중요한가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피아노가 먼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자기가 연주해야 예배를 드릴 수 있기에, 자신이 제일 훌륭하고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벽에 걸려 있던 시계는 피아노에게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시간을 알려 주어야 예배를 시작할 수 있으니, 당연히 중요한 것은 자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이크와 스피커는 중요한 것은 피아노나 시계보다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있어야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지붕에 박혀있는 작은 못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훌륭하고 중요해, 그러나 나는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존재야.........” 그 뒤 작은 못은 자신의 일에 대하여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소낙비가 쏟아졌습니다. 작은 못이 일하지 않으니 못이 박힌 틈으로 빗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피아노 위에 빗물이 떨어지자 피아노가 녹이 슬어 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빗물이 시계에 떨어지자 시계는 멈추고 말았습니다. 스피커와 마이크에 빗물이 떨어지자 더 이상 기능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못일지라도 작은 못으로서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께 모두가 필요하고 소중한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 소중하며 귀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내려다보고 얕게 평가하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나는 특별하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먼저 됐을지라도 나중 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게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다 같이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포도원인 주님의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같은 믿음의 이웃을 향한 나의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믿음의 자리에 함께 있는 이웃을 함부로 평가하며 심판합니까? 왜 이웃을 무시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2-5)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마 5:22 표준새번역)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들을 향한 영혼사랑의 뜨거운 애정을 가지지 못하면 먼저 됐을지라도 나중 된 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먼저 온 사람의 잘못됨은 ‘자만심’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자신이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자만한 것입니다. 이 자만심은 ‘공로자 의식’을 만들어 냅니다. 이 공로자 의식은 비 신앙적인 모습이고 자기기만의 태도입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군일 뿐이라는 것이 주인 앞에서 일군이 찾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한 데나리온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일거리를 준 주인의 은혜이고 배려일 뿐입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자기와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함께 은혜를 입은 처지에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비교해서 자만심이나 공로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자기이해입니다.
자만심이나 공로의식은 하나님 앞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내세울 나의 공로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내가 가질 자만심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하셨습니까? 우리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게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의 조그마한 헌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1808년 비엔나에서 대작 ‘천지창조’가 연주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 곡의 작곡가인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그는 몹시 늙고 병약하여 자기 의자를 끌어당길 힘조차 없었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감동받은 온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여 하이든에게 갈채를 보내고 환호했습니다. 하이든을 그 갈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자세로 일어서면서 손을 휘저어 자신의 공로를 부인하는 태도를 지으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고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내 작품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하이든은 의자에 앉다가 미끄러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이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있는 먼저 된 자의 자랑스러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만의 공로를 드러내는 것에 예민합니다. 이것은 먼저 됐을 지라도 나중 된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끝내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된 자로 부르셨습니다. 결코 먼저 된 자로 나중 된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먼저 된 자의 영광과 자랑스러움을 바로 간직할 수 있는, 천국의 역사를 가지고 살아가는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김성철 목사)

먼저 된 자의 나중 됨 (마 20:1~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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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Reed Wilderman

Birthday: 1992-06-14

Address: 998 Estell Village, Lake Oscarberg, SD 48713-6877

Phone: +21813267449721

Job: Technology Engineer

Hobby: Swimming, Do it yourself, Beekeeping, Lapidary, Cosplaying, Hiking, Graffiti

Introduction: My name is Reed Wilderman, I am a faithful, bright, lucky, adventurous, lively, rich, vast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